목차
Intro
재미없지만 반복해야 하는 점자 만지기 연습.
점자 모양을 다 알아도 실제로 읽기 위해서는 손끝으로 1.5mm의 작은 점을 수도 없이 만지는 ‘촉지 연습’을 거쳐야 한다. 굉장히 길고 지루한 과정이다보니 많은 시각장애 아동들이 이 단계에서 점자 공부를 포기하곤 한다. 행복나눔재단 R&D Lab 곽예솔 매니저는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점자 만지기 연습을 할 수 있는 교구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 <점자 학습 장난감 슬라이닷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2023년 7월, 점자 장난감 ‘슬라이닷(Slidot)’ 프로토타입이 세상에 나왔다. 슬라이닷은 점자 문제카드를 태그하면 안내 음성이 나오고, 문제카드에 쓰여진 점자를 읽고 정답에 맞는 버튼을 누르는 장난감이다. 예상보다 더 즐겁게 사용하는 아이들을 보며 솔루션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로토타입 개발 이야기 읽어보기
이후에는 슬라이닷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차례차례 최적화 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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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프로토타입 개발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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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최적화
이 리포트는 2단계 과정을 곽예솔 매니저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PROJECT 2단계|하드웨어 최적화
아크릴 → 브릭
슬라이닷 프로토타입의 하드웨어는 네모난 아크릴 상자 형태였다. 내부에는 RFID 칩이 부착된 점자 카드 인식 패드가 들어있고, 겉에는 문제를 읽고 정답을 입력할 수 있는 키보드 버튼 6개가 달려있다.
이 버전으로 솔루션의 효과와 필수 기능을 확인한 뒤부터는 하드웨어를 최적화 하는 과정을 거쳤다.먼저, 프로토타입을 테스트했을 때 아이들이 손목을 불편해 했다. 그래서 2차 버전은 기기 높이를 낮추고 버튼도 누르기 쉽게 더 크게 바꿨다.
슬라이닷 프로토타입
그런데 생각보다 자잘하게 수정할 부분이 많았다. 최적화를 위해서는 앞으로도 여러 번 피드백을 받고 적용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슬라이닷을 새로 제작하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더 빠르게 테스트할 수 없을까?’
아크릴 제작의 경우 설계도-모식도-부품 수급-재단-조립까지 약 7개월이 소요되었다. 특히, 소량 제작을 하다 보니 부품을 주문하고 받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테스트 결과를 바로바로 반영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컸다. 만약 장난감 외형을 직접 수정할 수 있다면 더 빠르게 최적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흔히 ‘레고’라고 부르는 장난감 브릭(brick)이다. 브릭이라면 언제든지 끼웠다 뺐다 하면서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고, 처음 재료비 외에는 수정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버튼이었는데. 기존 아크릴 버전에는 본체에 버튼까지 달려있었는데, 브릭으로는 버튼의 촉감과 기능을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대신 3~6개로 구성된 단축 키보드를 구입해 연결하기로 했다.
브릭으로 다양한 형태의 슬라이닷을 만들어보는 중
실제로 브릭으로 바꾼 뒤부터는,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 모양을 변경해 다음에 바로 수정 버전을 테스트 할 수 있었다.
크게는 총 5번의 수정이 있었다.
① 핸드폰을 앞, 문제카드를 뒤에 두고 태그하게끔 위치를 조정했다. 예상과 달리 보호자가 주로 앞이 아닌 옆에 앉아서 지도하는 것을 보고 더 태그하기 편한 위치를 찾은 것이다.
② 조작키 키보드 위치를 왼쪽으로 변경했다. 점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 때문에 최대한 손에 걸리는 것이 없도록 오른쪽을 비워두었다.
③ 키캡 사이즈를 2가지 옵션으로 제공했다. 찾기 편해 면적이 넓은 키캡을 선호하는 아이와 적은 힘이 들어 짧은 키캡을 선호하는 아이, 2가지 타입이 있다는 걸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④ 퀴즈모드로 들어가는 버튼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귀여운 장식을 달았다. 아이들이 문제풀이를 시작할 때 기분이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까지 반영해서 브릭 버전 슬라이닷이 완성되었다. 시각장애 아이들이 사용하게 해보았는데, 다 좋은데 휴대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⑤ 브릭 버전 슬라이닷에 뚜껑과 손잡이를 추가로 달았다. 보관과 휴대가 용이해 집 뿐만 아니라 학교, 카페 등 외부에서도 슬라이닷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뚜껑과 손잡이가 달린 최종 버전
이렇듯 키보드의 위치나 크기를 바꾸고, 퀴즈 모드 버튼에 캐릭터 키캡을 붙여보는 등 다양한 시도 덕에 최적의 레이아웃을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두이노 → 중고 핸드폰
콘텐츠를 탑재할 전용 기판&부품도 변화가 필요했다. 프로토타입은 ‘아두이노’라는 미니 CPU 기술을 활용해서 개발했는데, 빠르게 기능을 구현할 수는 있지만 오류가 잦아서 실제로 사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슬라이닷 작동에 필요한 4가지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더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전용 기판&부품이 필요했다.
슬라이닷 작동에 필요한 요소
- 스코어 계산을 위한 CPU
- 스피커
- RFID 문제카드와 연동되는 리더기
- 액정 디스플레이
우리의 대안은 ‘중고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에는 위 4가지 요소가 모두 내장되어있고, 심지어 더 성능도 좋고 버그도 적어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중고 핸드폰이라면 5만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이렇게 중고 핸드폰이 최종 채택되면서 핸드폰에 탑재할 앱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문제 카드를 태그하면 안내 음성이 나오고 정답을 맞추면 효과음이 나오는 ‘기본 기능’으로 시작해서, 기능을 조금씩 추가하면서 개발을 이어갔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소프트웨어 최적화’ 이야기를 참고하면 된다) 또 슬라이닷 본체에도 핸드폰을 놓을 수 있는 거치대를 추가했다.
이런 최적화 과정을 거쳐 지금의 슬라이닷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맨 처음과 비교하면, 카드를 태그하고 버튼을 눌러 문제를 맞추는 기본 기능은 동일하지만 외형은 큰 변화가 있었다.
브릭과 핸드폰. 별 건 아니지만 긴 시간과 큰 비용을 들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대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기술들을 사용해 새로운 솔루션을 만든다는 점에서, 슬라이닷에는 행복나눔재단이 일하는 방식이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의외의 효과도 있었다. 슬라이닷을 처음 기획할 때 아이들이 놀이하듯 점자를 배우도록 하는 게 목표였는데. 브릭을 만지면서 핸드폰을 같이 사용하다 보니까 아이들이 더 게임처럼 느끼고 흥미로워 했다. 여러 고민의 단계 끝에, 만드는 입장에서도 사용하는 입장에서도 좋은 솔루션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Project Note
우리는 ‘저렴하고 단순한 장난감’ 만들기에 집중했다. 고가의 고성능 기계는 아이들 장난감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담 없이 갖고 놀 수 있고, 고장 나도 싸고 빠르게 수리할 수 있는 장난감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간단한 기능의 장난감도 싸게 만들려면 대량생산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연간 1만대 이상의 수요가 있어야 한다. 반면 슬라이닷을 쓸만한 맹학교 유치부~초등 저학년의 시각장애 아동은 많아야 20~30명 정도에 불구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에 만들어진 기술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PROJECT 3단계|소프트웨어 최적화
슬라이닷의 ‘속’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슬라이닷 사용이 점자 능력 향상으로 이어지려면 많이 쓰고 문제를 많이 풀어봐야 한다. 아이들이 ‘점자 문제카드 하루에 10장 풀게 하기’를 목표로 잡고, 이를 위해 필요한 과정을 세 단계로 설정하고 각각에 맞는 콘텐츠를 앱으로 개발했다.
슬라이닷 앱 화면
① 친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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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게임 모드
아이들이 슬라이닷을 처음 쓰는 모습을 지켜보니, 드물게 낯가림이 심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키보드 누르는 걸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하지만 키보드 번호가 아직 익숙지 않고 손가락이 힘이 약하다 보니 정확하게 누르는 걸 어려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점자 문제와는 별개로 키보드 누르는 연습을 할 수 있는 키보드 게임 모드를 개발했다. 숫자를 듣고 그에 맞는 키워드를 눌러보면서 위치와 감각을 익힐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때 개발 포인트는 ‘너무 재미있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키보드 게임이 본 퀴즈보다 재미있으면 점자 학습에 자칫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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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침 ON/OFF 기능
시각장애 아동들은 시각 정보가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소리에 예민한 경우가 많은데. 재미를 위해 슬라이닷에 넣은 초침 소리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었다. 이 째깍째깍 소리를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에 무서워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초침 소리를 켜고 끌 수 있게 옵션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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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장난감과 함께 마음 열기, 보호자 독려
슬라이닷을 들고 처음 방문할 때는 꼭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이나 장난감을 사가서 라포를 형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매일 옆에 붙어서 지켜볼 수는 없기에, 보호자가 옆에서 슬라이닷 사용을 독려하도록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② 재미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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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정답 리액션
어느 정도 슬라이닷이 익숙해지고 나면 재미를 느끼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정답 리액션이다. 정답을 맞췄을 때 좋아하는 리액션이 나오면 더 재미있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라이닷은 답을 입력하면 “딩동댕”, “YEAH”와 같은 12개의 정답&오답 효과음이 랜덤으로 나온다. 또 원하는 음성을 녹음해서 추가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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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콤보
개인적으로 게임 할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은 콤보를 달성했을 때이다. 이 경험을 녹여 슬라이닷에도 콤보 스코어 기능을 추가했다. 정답을 연속으로 맞추면 콤보 수를 알려주고 그 수만큼 진동이 울린다. 예를 들어 5번 연속으로 정답을 맞췄다면 “5콤보” 하면서 진동이 5번 울리는 것이다.
아이들을 관찰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아이들은 콤보가 깨지면 오히려 학습의지가 꺾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5콤보에서 실수하면 3콤보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나름의 방지책도 세웠다.
또 콤보 기록을 경신하면 “신기록이야!” 소리가 나온다. 아이들의 꺄르륵 웃음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때가 이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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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 난이도 제공
학습 현황을 모니터링 하며 맞춤 난이도의 문제를 제공했다. 문제가 너무 어려우면 금방 싫증을 느끼고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려워하는 문제와 잘 푸는 문제를 적절하게 섞어서 제공했을 때 아이들은 문제를 더 많이, 더 오래 풀었다.
슬라이닷 문제를 푸는 시각장애 아동
③ 꾸준히 사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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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워드
재미를 느꼈다면 그 다음엔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고 점자 실력이 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장난감 리워드이다. ‘일주일 동안 매일 문제카드 10장 풀기’와 같이 개인별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면 장난감을 주는 것. 장난감은 슬라이닷 브릭과 호환되는 걸로 준비해 슬라이닷 꾸미기, 일명 ‘슬꾸’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직접적인 보상이 생기자 아이들은 슬라이닷을 스스로 챙겨서 사용했다.
기린 장난감을 슬라이닷에 꽂아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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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통계
아동별 학습 진도와 어려움을 파악하기 위해 체크표 양식을 만들어서 그날 그날 풀었던 문제 레벨/번호/유형/체감 난이도 등을 보호자가 기록하게 했다. 연락이 뜸한 경우에는 직접 연락해서 사용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자세히 물어보았다. 이런 정보는 아동의 학습 관리는 물론 슬라이닷을 최적화 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데이터였다.
지금까지는 수기로 작성했다면, 향후에는 슬라이닷 사용 시간/모드/문제 번호 등을 한눈에 보고 정확한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사용 통계 페이지를 개발할 계획이다.
수기로 작성해오던 문제카드 체크표
RESULT|아동들의 점자 촉지 능력 향상
하루 10분 점자 학습
4개월 동안 7세 시각장애 아동 5명에게 슬라이닷을 사용하게 했다. 이중 4명이 사용률 50% 이상을 유지했고 70%에 가까운 아동도 있었다.
그 전에는 집에서 (실제 크기의) 점자를 만지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슬라이닷이 생기면서 하루에 10분 이상 점자를 만지는 날이 많아진 것이다. 이런 결과를 통해 아이들이 슬라이닷을 통해 점자 공부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용률 : 전체 기간 중 슬라이닷을 사용한 날의 비율
또 사용률이 50%가 넘는 아동 3명 [아동1·2·3]은 손으로 점자 모양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한글 읽기 연습을 하고 있다. [아동4]의 경우, 슬라이닷 기기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 편이었지만 점자 모양 구분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동5] 역시 사용 빈도는 적지만 꾸준히 슬라이3닷을 사용하며 점자 능력이 향상되고 있다.
“공부한다는 생각 안 들고 즐겁게 해서 좋은 것 같아요.”
”오늘 복습시켰더니 신기록 세운다고 난리가 났어요. 카드 20장 해치우고 저는 그만하자고 했는데 스스로 또 하더라고요.”
”처음 단계에서 아주 유용하게 잘 썼고, 이제 자모음 단어를 조합해서 읽고 써보는 단계에 있어요.”
”점차 슬라이닷으로 점자 읽기가 좋아지더니 방학숙제도 거부감 없이 하고 있답니다.”
- 슬라이닷을 써본 시각장애 아동의 부모
슬라이닷은 교육현장에서 실제 점자를 가르치는 교사나 지도자에게도 반응이 좋았다. 필요한 기능을 잘 담고 있고 점자 학습에 유용하다는 평가였다.
“만드는 사람의 욕심으로 많은 기능을 넣은 교구일수록 현장에서는 오히려 잘 안 쓰이게 돼요. 슬라이닷은 실제로 꼭 필요한 기능만 잘 담고 있어서 현장에서 유용할 거 같아요.”
- 특수학교 교사
“한소네*에서 한글 연습에 필요한 기능들을 따로 빼서 구현한 점이 좋아요. 슬라이닷 키보드로 연습하면 자연스럽게 한소네를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점이 엄청 실용적이에요!”
-점자 지도교사
*한소네 : 시각장애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휴대용 점자 단말기로, 점자 셀이 올라와 촉지로 읽을 수 있다.
앞으로 장난감 연구소는…
물론, 아직 완성이라고 하긴 이르다.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업그레이드 계획도 있다. 행복나눔재단에서 개발한 시각장애 학습지 <점프>와 연계해 다양한 난이도의 콘텐츠를 개발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슬라이닷이 점자 모양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자음&모음을 구분하고 이를 조합해 단어를 읽는 수준까지 콘텐츠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앞선 언급했던 사용 통계 페이지도 개발할 계획이다.
2023년 1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지난 1년 반 동안, 어떻게 하면 슬라이닷을 더 재미있게 만들까 몰두해왔다. 앞으로도 우리만의 장난감 연구소 실험은 계속될 예정이고, 그 이야기는 후속 리포트에서 나누도록 하겠다.
곽예솔 매니저
yes_all_@skhappiness.org